신앙 서적 "완전 소중한 선물" - 박성민 지음

2012.02.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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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소중한 선물
박성민 지음

존재가 부정 당하는 시대 속의 하나님(1:1)

오늘날, 어느 복음서든 관계없이 마주치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에는 없었으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숱하게 경험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의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부정할 수 없었던 당연한 사실이 이제 더 이상 당연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전제이지 의문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21세기에 복음서를 쓴다면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최소한의 언급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무신론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무신론과 연관하여 유명세를 타는 두 학자가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호킹 박사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 중 하나인 『만들어진 신』은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어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 물리학자라는, 학문적 전문성을 인정받은 학자입니다. 그리고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그 후 50년 가까이를 생존하고 있는, 특별한 그의 삶 자체가 이슈입니다. 이렇게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닌 그들이 전파하는 무신론은 파급 효과가 대단합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걸까요?

먼저,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을 살펴봅시다. 그는 『만들어진 신』에서 신이란 미치고 착각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 발명된, ‘정신병적 비행을 저지르는(psychotic delinquent) 존재’라고 평가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신’인데, 사람들이 ‘신’이라는 전염성 있는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왜곡된 지적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하지 않는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를 유아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심지어 악하다고 폄하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밑바닥에는 “과학이 신이 없음을 증명했다”는 가정과 확신이 깔려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물리학 측면에서 우주의 기원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에 대해서도 무신론의 입장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그의 이론은 물리학자 레오나르드 믈리디노프와 함께 쓴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에 나옵니다. 요지는 “양자(quantum)의 요동에 의해 무(無)에서 미세한 우주들이 창조되고 그들 중 일부는 급팽창하여 은하들과 별들을 탄생시킨다.”는 주장입니다. 모든 것이 어떤 질서나 법칙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우연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냥 존재하는 물리 법칙이 우주를 만들었고 그러한 우연에 우연이 더해져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물리법칙이 있었다.”라고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더 나아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를 통해 “천국이나 사후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꾸며낸 동화에 불과하다.”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뇌가 깜빡거리는 순간 이후에는 어떤 것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뇌를 부속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어 버리는 컴퓨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는 “고장 난 컴퓨터에 천국이나 사후세계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죽음 이후의 다른 세계의 존재란 다 헛소리라는 것입니다.

스티븐 호킹 또한 리처드 도킨스와 같이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들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우리의 생명에 대한 이해 및 사후의 삶에 대한 가능성 등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는가?: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어보면 그는 신이 없다는 가정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 자체를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없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주장에 심취하여 그 주장에 반하는 다른 증거들을 다 무시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의 존재에 관한 믿음은 인간이 성숙함에 도달하면 사라져야만 하는 유치한 망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숙해진 후에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도 잘 알고 있는 C. S. 루이스(C. S. Lewis)도 이 경우에 속합니다. C. S. 루이스는 어려서부터 확고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교수생활을 하던 서른 살에 이르러 유신론으로 돌아섰고, 그로부터 2년 후 옥스퍼드대학의 동료 교수인 톨킨(J.R.R. Tolkien, 『반지의 제왕』의 저자)과의 긴 대화를 통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당연시하며 근거로 삼고 있는 과학이 신의 부재를 증명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셀 수 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신앙인인 것을 왜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그의 시도는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종교 비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의 접근법은 순환논리의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삼단논법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전제라는 시작이 잘못되어 있으면 거기서 나오는 소전제가 맞을지라도 결론이 틀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이 지닌 문제와 유사합니다. “네 발을 가졌으면 포유류이다(대전제), 의자는 네 발이 있다(소전제), 의자는 포유류이다(결론).” 비록 소전제가 맞는다고 할지라도 대전제에 문제가 있기에 결론이 잘못 나오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불신이 그가 내린 결론으로 나오는 것이지 결코 그가 생각하듯 무신론을 증명한 것이 아닙니다.

스티븐 호킹의 주장 또한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우주의 시작에 관한 이론,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부정은 논리적 한계를 지녔을 뿐 아니라 그 주장을 반박하는 경험적 증거들이 많습니다. 먼저 『위대한 설계』라는 그의 책 제목부터가 기독교계에서 주장해 온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theory)에 대응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적 설계론이 “우주와 생명체에는 질서가 있는데 그것은 특정성을 지닌 복잡한 정보를 갖고 있으며, 인격체에 의해 지적으로 설계됐다.”고 말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위대한 설계』는 “우주와 생명체는 무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내적 모순을 보여줍니다. 우연이나 자발성에 ‘설계’와 ‘위대함’이라는 의도성과 가치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듯 ‘우연성’이 맞는다면 과연 어떻게 ‘위대함’이라는 의도성과 가치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의도성과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닙니다.

“무에서 유가 생겨났다.”는 자연 발생론적 이론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점도 없고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현재라는 시간은 존재하지도 않고 과거 역시 무의미할 것입니다. 시작점을 무시하면 ‘존재’ 자체가 논의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우주의 시작에 관해 학자들이 가장 많이 주장했던 빅뱅 이론은 최소한 ‘빅뱅’이라는 시작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50억 년 전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응축된 물질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지금과 같이 우주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시작점과 원인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티븐 호킹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는 시작도 없고 존재의 원인도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빅뱅이론이 안고 있는 치명적 한계를 뛰어 넘고자 하는 또 다른 어리석음으로 보일 뿐입니다. 바로 “대단히 응축된 그 물질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라는 ‘시작 이전의 시작’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빅뱅이 가능 하려면 우주가 무한에 가까운 고밀도에, 크기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로 시작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오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 없이는 그런 시작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옥스퍼드대학의 앨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는 “우주는 신이 아닌 물리학 법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스티븐 호킹의 주장을 정면 반박합니다. “중력법칙이나 물리학 등은 어떤 상태에서 발생한 결과에 대한 설명일 뿐이지 법칙 자체가 특정 세계를 창조할 수는 없다.” 앨리스터 맥그래스 교수가 예로 든 축구 경기의 비유는 압권입니다. 아이작 뉴턴의 운동법칙은 선수가 골을 넣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운동법칙이 원인이 되어 골이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골을 넣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의 개입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스티븐 호킹의 “창조자를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물리학의 법칙이 이미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전혀 새롭지 않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는 무신론을 펴고 있는 스티븐 호킹에게 공을 넘깁니다. “과연 물리학 법칙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가? 어떻게 중력이 가장 첫 단계에 존재하는가? 누가 그것을 가져다 놓았는가?” 솔직히 저도 스티븐 호킹 박사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무엇이라 답을 할지 궁금합니다.

오히려 스티븐 호킹은 천체물리학자 로버트 재스트로가 『신과 천문학자』(God and the Astronomers)에서 한 솔직한 고백에 동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같아서는 창조의 신비를 가린 커튼을 과학이 걷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성의 힘을 믿고 사는 과학자에게는 이번 이야기가 악몽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까지 무지의 산을 오르던 과학자가 이제 막 정상을 정복하려고 마지막 바위를 짚고 서는 순간,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곳에 앉아 있던 신학자 무리가 그를 반기기 때문이다.” 로버트 재스트로의 말은 모든 시작의 시작점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솔직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 호킹의 시도는 난제를 벗어나기 위해 학자적 양심을 저버린 주장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후세계를 ‘맛본’ 이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스티븐 호킹의 주장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그는 사후세계나 천국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동화와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존재에 대한 부정을 뛰어넘어, 이 세상에서의 삶 외에는 더 이상의 것이 없다는 철저한 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부정하는 증거로 최근 임사체험(臨死體驗, NDE; near-death experience)을 했다는 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임사체험이란 말 그대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 소생하여 의식을 회복한 후에 자신이 사후세계를 맛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그런 체험 자체가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의학 기술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심폐소생술 등을 통해 사망 직전 혹은 사망과 다름없어 보이는 상태에서 소생하는 사람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임사체험자가 체외이탈 중에 관찰한 사건이나 획득한 정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종착지인 천국에 대해 비록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나 분명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관해서는 신비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신명기 29장 29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 속하였나니” 분명히 나타난 일은 사후세계가 있으며, 죽음 이후의 삶의 질은 이곳에서의 우리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왓슨 크릭과 프랭클린 윌킨슨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표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인 2003년 4월, 10년 동안 세계 6개국 2천 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31억 6,470만 개의 유전자 서열을 모두 밝히는 유전체(게놈) 지도를 완성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간 과학 지식의 최고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놀라운 업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프로젝트를 총 지휘한 학자가 바로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신의 언어』에서 10년의 연구 과정을 회고합니다. “인간 게놈 서열을 관찰하고 그 놀라운 내용을 밝히는 일은 경이로운 과학적 성취이자 하나님을 향한 숭배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에게 영향을 주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할 때 사용한 언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신 가장 신성한 선물에 깃든 복잡성과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과학적 시각을 영적 시각으로 끌어올리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그는 “오늘은 전 세계에 경이로운 날입니다. 지금까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던 우리 몸의 설계도를 처음으로 우리가 직접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에 저는 겸허함과 경외감을 느낍니다.”라고 더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과학자로서 조언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이해하려면 과학적 관점과 영적 관점이 갖는 힘을 모두 동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크리스천인 그가 보기에 과학은 성경과 대립하기는커녕 오히려 성경의 토대가 된다고 말합니다.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은 무신론보다 더 과학적인 감각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생각의 시작은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에 따라 생각이 형성됩니다. 어떤 이가 우주와 그것의 탄생에 대해 “이건 그냥 물리 현상들일 뿐이야. 설계 같은 것 없어. 분자와 분자들이 부딪치는 것뿐이야.”라고 말한다면 저에게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할 듯합니다. 현대의 신(新)무신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멍텅구리다.”라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는 제게 믿음이고 그 믿음을 받쳐 주는 증거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결국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의 표현처럼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입니다.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는 모든 것이 어떤 선택(Choice)을 하느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 중의 선택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선택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그곳에서 당연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던져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어떠한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러한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할 것인가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1:1~18)

알쏭달쏭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포스트모더니즘이란 20세기 중반 이래 서구 문화 전반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 추세를 향한 표현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몰고 온 변화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첫째는 먼저 이성에 대한 비판과 불신을 들 수 있습니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설명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이라는 말도 과거와 같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경험과 실천 중심으로 다원적이며 주관적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됩니다.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을 중시하고, 절대적 진리 추구보다 상대성, 역사성이 주목을 받습니다. 결국 그 문화적 시각이 다원주의(多元主義)를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일어나는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종교다원주의의 열매는 한 증거일 뿐입니다.

둘째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거부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실재(實在)를 인정했기에 그것에 관한 참된 진술, 즉 진리(眞理)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실재가 존재하는가?” 또는 “진리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조차 어리석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시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참된 진리는 존재하지도 않고, 그런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 배후에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려는 권력(의도)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진리(사실)라는 것은 사회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도덕이나 규범의 영역에서 ‘상대주의’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게 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지켜야 할 보편적인 도덕 또는 규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절대적 본질’에 대한 부정입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과거에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상 뒤에서 그것을 존재케 하고 움직이는 실체 또는 힘인 본질(本質)이 있다고 여겼으며 그것을 더욱 중요시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본질은 존재하지 않고 현상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현상 자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이성, 진리, 본질에 대한 거부와 반대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입니다. 당연히 복음 전파가 쉽지 않습니다. 절대성과 진리를 부정하는 세상을 향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해서만 가능한 구원’이라는 ‘예수의 유일성’을 전하는 것 자체가 도전을 부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왜 유난히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 강해지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의 미디어가 리처드 도킨스나 스티븐 호킹을 왜 ‘띄워’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맡겨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공격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이 아닌 다른 ‘메시지’를 담아야 할까요? 예수님의 유일성을 종교다원적 메시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는 더 이상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분명히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기독교는 모던 시대에 경험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도전을 경험합니다. 한때 회의론자는 기독교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왜 기독교는 옳은가를 열심히 변론하며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회의론자는 절대적 가치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기독교를 거절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철저히 세상을 이해하며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야 합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말씀에 분명히 서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선포된 진리’라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증언된 진리’가 더욱 더 중시되는 시대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시대에서 “나는 느낀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또는 “나는 경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변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요한은 서문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말씀’(로고스)이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1절),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이시며(3절), 구원자이시며(4절), 인간으로 오셨으며(10절), 또한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18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걸작일 뿐 아니라 신비한 존재를 만드신 로고스에 관한 가장 엄청난 발언이 14절에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사람의 형태로 취했다’ 또는 ‘사람 안에 거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인 척 가장했다거나, 예수라는 인간과 공존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신이 만든 사람의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과 연결하여 보자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 사건은 계시 중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한 학자가 표현했듯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입니다.

로고스가 육신으로 오신 것(성육신)은 추상적이거나 이론적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분은 인간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14절). 여기서 ‘거하신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단어입니다. 구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성막’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자 거룩한 하나님과 반역한 인간이 화해하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막으로 나와야 하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은혜와 진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나와 있듯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14장의 한 사건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빌립이라는 제자가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14:8).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빌립아 내가 이렇게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14:9)이라고 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된 이 사건은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왜 오셨는가?” 아니 “왜 사람의 모습으로 탄생하셨어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답은 요한복음을 통해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과는 다른 이유였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중에 죽기 위해 태어난 경우는 없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도 불교의 석가모니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만, 그들이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잔인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죽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오신 이유입니다. 그분의 존재의 유일성에 더해 그분의 삶과 죽음의 독특함이 바로 이것입니다. 놀라운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방황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어둠 속에 거하고 있으며(5절), 그로 인해 자신의 창조자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존재들을(10절)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었기에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적을 경험하며 사는 삶(4:43~5:15)

세상이 갈수록 살기 어려워진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기적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이해가 있을 때만이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믿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기적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갖는 것도 문제입니다 기적에 대한 올바른 패러다임이 결핍되어 있다면 기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기적 자체를 향한 지나친 관심은 위험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기적이 가리키고 있는 중요한 사실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경험한 두 개의 사건을 통해 ‘표적’을 경험하려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 만남의 중요성: 먼저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어 온갖 수단을 다 써봤지만 죽어가고 있는 왕의 신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들었기 때문에 그분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들이 죽을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 신하는 예수님을 찾아갈 이유도,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불행이 가지고 온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왕의 신하와 같이 예수님을 찾아가 구하는 선택을 하는 이들에게만 불행이 축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인생은 환경과 천성의 산물이 아니라, 선택의 산물이다.”는 표현을 생각해 봅니다. 어떤 행동을 취하기로 선택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상황을 뛰어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어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왕의 신하와는 달리 이 병자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십니다. 그는 육체의 질병은 물론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영혼의 병으로부터 치유 받아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간헐천이었나 봅니다. 베데스다 못에 오는 병든 자들에게 믿음으로 나음을 경험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양한 환자 중에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갈 수 있는 환자는 피부병 환자이고,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 등이 그 다음 순서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38년 동안 병들어 누워 있어야 하는 이 사람에겐 기회조차 없었음이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병이 나아 돌아가는 이들을 쳐다보며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병자를 향해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셔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매우 생뚱맞게 들립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것이 치유가 일어나기 전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대해 답을 찾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필요합니다.
또한 그 질문은 나음을 향한 그의 깊은 갈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38년의 고통으로 이 사람은 의욕 상실, 기대 상실, 꿈을 포함한 모든 것이 상실된 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향해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라는 그의 답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함께 다른 이들을 향한 원망과 실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때문에 베데스다는 ‘은혜 또는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오히려 ‘절망 또는 잔인의 집’이라는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 병자 이야기에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들어 왔지만 베데스다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물이 동하기만 기다리는 병자처럼 영적 소경이요, 영적 절름발이요, 영적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몸이 낫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영혼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치유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됩니다. 그분을 찾아가시든지 아니면 지금도 찾아오셔서 당신을 만나기 원하시는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십시오. 그것이 모든 치유의 시작을 위한 절대적 필요조건입니다.

기쁨과 행복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7:37~39; 8:12~20)

생명이신 예수: 요한복음 7장 2절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인 초막절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기념 축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생활했던 역사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마지막 날 아침에는 특별한 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실로암 연못의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주셨던 것을 감사함과 동시에 약속의 땅에서 농사짓는 데 부족하지 않도록 비를 내려 달라는 기원을 담고 있었습니다. 의식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생명수에 대한 필요성이 간절한 바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7~8) 이는 마치 시골에서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던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예수님을 펌프의 마중물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시면 그 물이 내 안에 들어와 생수의 강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영적인 보화들이 예수님을 통해 불려 나옴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요란한 트림 소리만 내는 펌프라도 마중물을 부은 후에 펌프질을 시작하면 물을 퍼 올립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비유에 담긴 정확한 의미는 물론 성령의 축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39절). 예수님을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개인의 주, 개인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모든 영적 갈증이 해소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분을 영접할 때 성령님이 우리 속에 내재하시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성령의 열매와 축복을 경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경험하는 특별한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축복과 행복은 그분을 영접함으로 시작됩니다. 그분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든, 어떤 상황이었든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인생의 정상에 서 있던 니고데모뿐 아니라 인생의 막장을 경험하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분을 만나면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수의 강, 기쁨의 강이 넘쳐납니다. 회복이 시작되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분의 특별하고 섬세한 계획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삶의 비밀(15:1~17)

예수님 안에 거함의 중요성: 예수님은 자신을 단순히 포도나무라 부르지 않고,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말씀을 염두에 두신 표현입니다. 이사야서에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사5:1~7). 그중에서 2절과 4절은 하나님의 정성과 실망을 동시에 잘 보여 줍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나무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2절)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4절)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최고의 정성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들포도를 맺은 것을 지적합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7절) 유다 사람들의 삶 속에 팽배한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들을 염두에 두시고 대조되는 대상으로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극상품 열매를 맺는 ‘참 포도나무’라고 말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달린 가지들만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기대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가지가 될 때만이 나무에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에너지의 원천일 뿐 아니라 영양을 공급하고 포도를 맺게 하는 생명선이 바로 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거하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현재형을 사용해서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분과 대화로 하루를 시작하는 ‘경건의 시간’은 중요합니다. 새로운 24시간을 선물로 받은 데 대해 감사를 드릴 수도 있고, 이 시간을 어떻게 쓰기 원하시는지 묵상에 잠기는 시간입니다. 하루를 보내며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의 시작부터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분에게 지속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감사도 포함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과 죄에 대한 고백이 중요합니다. 약속에 의지해서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요일1:9). 마지막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요14:26). 그분의 인도하심으로 지속적으로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생존할 수 없습니다(5~6절).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의 기도 응답도 받게 됩니다(7절). 기도는 가지인 우리에게 맺힐 열매의 일부입니다. 기도에 응답하시고(요14:13)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8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18:1~4, 19~24, 28~40, 19:1~24, 28~30)

인간의 죄와 허물의 온전한 해결책: 모든 생물은 살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예외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왜 그러한 길을 선택하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나와 있듯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생로병사와 같은 한계 상황을 경험하고 ‘해결되지 않는 고독’과 ‘영원한 방황’을 겪으며 궁극적으로 절망스런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해 허물로 가득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이셨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라는 표현입니다. 양들은 근시안적이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도 없으며, 쉽게 더러워지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들과 유사합니다. 양들이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듯 인간들 또한 인생의 목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인생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순간의 이익을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죄성을 지녔기 때문에 쉽게 죄를 선택하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척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인간들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죄성으로 가득하여 타협하고 정당화하며 불의를 식은 죽 먹듯 행하는 모습 말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은 피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와 허물을 해결하기 위해 택하신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회복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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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질문: 제가 왜,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심지어는 살인한 자들과 다름없은 중죄인 된다는 말씀입니까? Admin 2011.05.19 2436
15 질문: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 스러우신데, 나의 죄는 눈감아 주시지 않을까요? Admin 2011.05.19 2704
14 질문: 평생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온 저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죄인입니까? Admin 2011.05.19 2402
13 질문: 내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요? Admin 2011.05.19 2450
12 질문: 나는 아직 젊고 앞으로 살 날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데, 구태여 영생의 문제를 지금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Admin 2011.05.19 2599
11 질문: 제가 크리스쳔이 되면 진정, 저의 인생이 바뀌게 됩니까? Admin 2011.05.19 2315
10 질문: 제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요. Admin 2011.05.19 2655
9 Q. If that be the case, I must plead guilty. I have sinned. What must I do to be saved? Admin 2011.05.19 2661
8 Q. Why would God judge me the same as somebody who is grossly immoral, or a murderer? Admin 2011.05.19 2469
7 Q. God is a loving, merciful God. Won't He pass over my sins? Admin 2011.05.19 2666
6 Q. I have lived a fairly good life; am I condemned? Admin 2011.05.19 2465
5 Q. When I do die, won't that be the end of me? Admin 2011.05.19 2276
4 Q. When I do die, won't that be the end of me? Admin 2011.05.19 2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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